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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교도의 위대한 신학자 존 오웬(1616-1683)-2기독교 관련 단체와 인물의 역사 2023. 4. 25. 16:22반응형
이전 포스팅을 통해 존 오웬이 태어나 신학자로써 점점 명성이 높아지고 의회에 연설 후 옥스퍼드 대학교에 부총장에 오르는 등의 과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 이후 그의 저작활동 등을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옥스포드에서 사임하다
오웬은 1657년에 부총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8년 동안 있었으면서 대속의 필요불가결성을 주장한 '하나님의 의'(1653년), 일련의 설교들을 모은 '하나님과의 교재'(1657년), 아르미니우스 주위를 공격한 그의 마지막 저서인 '성도의 견인 교리'(1654년)를 썼고, 700여 쪽에 걸쳐 소키누스주의와 칼빈주의 간의 모든 중요한 쟁점들을 다루면서 소키누스주의를 비판한 '복음의 신비'(1655년), '죄 죽이기'(1656년), '분파주의'(1657년), '시험'(1658년) 등을 썼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1657년 7월 3일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총장직을 사임했고, 7월 18일에는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총장직에 취임했는데 그로부터 6주 후에 오웬은 옥스포드 대학교에 부총장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원래 오웬과 올리버 크롬웰의 사이는 아주 좋았지만 그가 1653년에 호국경이 되면서 호국경 취임에 반대했던 오웬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658년에는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메리 호국경이 되었습니다. 이 해에 오웬은 회중주의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토대로 해서 작성한 회중주의 교리 표준인 사보이 선언을 작성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660년에 장로파가 득세하고 에드워드 레이놀즈가 다시 복귀하면서, 오웬은 크라이스트 처치 학장직을 사임했습니다.
이 후 오웬은 고향인 스태드엄으로 은퇴해서 여러 논쟁적이고 신학적인 저작들을 썼습니다. 이 기간에 쓴 그의 역작인 '온갖 다양한 신학 담론들'(1661년)은 성경 속에 나오는 갖가지 신학 담론들을 찾아서 성경 자체에서 신학들이 어떻게 발생해서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한 책입니다. 또한 프란체스코 수도의 수도사인 존 빈센트 케인이 1661년에 저 유명한 '빛이 있으라' 는 책을 써서 개신교 안에서의 여러 분파들과 혼란성을 비판하며. 반면에 로마 카톨릭은 하나로 연합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찬양하자. 오웬은 1662년에 '빛이 있으라를 혹평함'을 출간에서 케인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1667년에는 외교적인 수사가 아니라 좀 더 정확한 성경에 가르침들을 제시할 목적으로 쓴 '요리문답'이 출간되었고, 1668년에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시편 130편 강해, '히브리서 강해' 제1권이 출간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는 그가 20여 년 동안 준비해온 역작이었습니다.
옥스포드 주교 새뮤엘 파커가 '교회의 정체'를 써서 비국교도들을 공격해오자, 오웬은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진리와 순수'(1669년), '삼위일체론'(1669년)을 썼고, '복음적인 사랑과 평화'(1672년)을 썼습니다. 1674년에는 '히브리서 강해' 제2권이 출간되었습니다. 1677년에는 왕정복고 시대에 교인들의 서글픈 모습을 설명한 '배교'. '신앙의 이유'와 '칭의론', '성령론'(1677-1678년)이 출간되었습니다. 1678년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법들과 수단들', 1679년에는 기독,론 1680년에는 '히브리서 강해' 제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교회 정치와 관련한 자신의 가장 후기의 견해를 담은 '복음적인 교회 탐구', '영적인 사고' 1682년에는 '성령과 기도'. 1684년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 제1부, '히브리서 강해' 제4권이 출간되었습니다. 1688년에는 '죄와 은혜의 지배', 1691년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 제2부, 1695년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의 증거들'이 출간되었습니다.
1660년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166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축일에 통일령에 서명하면서 모든 비국교도들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때 오웬도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직과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학장직을 물러났고 그 후에는 거의 저술에 전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마다 그가 쓴 저술들을 열거한 것은 그 저술들을 소개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에게 저술은 곧 그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웬이 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의 첫 번째 쪽이 인수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아침은 1683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축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의 오웬은 런던에 일링 자치구에서 죽었고 11일 후인 9월 4일에 런던의 이즐링턴 자치구에 있는 버닐 필즈에 묻혔습니다.존 오웬의 시대사명
살펴본 바와 같이 오웬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정립된 복음에 입각한 설교들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고, 청교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복음적인 경건이 많이 쇠퇴한 시대였고, 한편으로는 14~16세기에 유럽을 휩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소키누스주의라는 인본주의적인 경건 운동이 생겨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 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경건이 여전히 주루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적인 경건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온갖 종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혼란과 헤이였고, 이에 대한 해법으로 성화론이라는 기둥을 다시 일으켜 세워 실천해가는 것이 해법이라고 오웬은 믿었습니다. 그에 따라 대표작인 '죄 죽이기'를 비롯한 많은 저서를 통해 개혁주의 정통주의의 성화론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오웬의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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