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영국 청교도의 위대한 신학자 존 오웬(1616-1683)-1
    기독교 관련 단체와 인물의 역사 2023. 4. 25. 15:21
    반응형

    오웬은 영국 청교도 신학자로 칼빈 이후 가장 위해한 신학자로 불립니다. 그가 쓴 책은 오늘 날까지도 기독교인들에게 필독서로 불릴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존 오웬의 일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생과 성장

    오웬은 웨일스 출신의 청교도 가문에서 1616년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스태드엄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웬의 가문은 원래 웨일스 지방에서 고위직을 지낸 명문가였지만, 그의 선조는 배신에 의해 살해당하고 몰락했습니다. 오웬의 조부였던 험프리 오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 헨리 오웬은 교회에 바쳐져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고전어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옥스퍼드셔의 스태드엄 교회의 부제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포도원에서 진정으로 애써 일하는 일꾼'이라는 평판을 얻은 청교도였습니다.

     

    오웬은 1616년에 이 헨리 오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옥스퍼드에 있는 사립학교에 들어가서 애드워드 실베스터의 지도 아래 고전어와 학문의 기초를 배웠고, 12살에 이미 대학교에 들어갈 실력을 갖추어서 아주 어린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퀸스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1632년에는 인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635년에는 인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는 하루에 4시간만 자며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1633년에 윌리엄 로드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취임하여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비국교도를 탄압하는 법령들을 제정하자, 오웬은 1637년에 옥스퍼드 대학교를 떠나서 로버트 도머 경 가무느이 가정교사로 일했고, 그 후에는 버크셔의 러브레이스 경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습니다. 버크셔를 떠난 후에는 런던으로 옴겨서 차터하우스 야드에 살랐습니다. 오웬은 이시기에 정신적인 방황을 겪고 있었는데, 이것은 옥스퍼드 대학교 때부터 시작된 신앙적인 고민이었습니다. 이 방황과 고민의 원인에는 여러 외적인 요인들도 작용했지만, 가장 주된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신앙적인 고민과 방황,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난 그의 경험은 나중에 그가 쓴 '시편 13편 강해' 속에 녹아있는 것으로 보닙니다.

    오웬이 이 신앙적인 방황과 고민에서 벗어난 계기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당시에 유명했던 장로파 목사인 에드번드 캘러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올더맨베리 교회에 갔다가, 우연히 캘러미 대신에 강단에 선 한 무명의 시골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마태복은 8장 26절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했고, 그 설교가 끝났을때 오웬은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의 방황과 고민에서 벗어난 오웬은 청교도 혁명과 영국 내전이 발발하자, 의회파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서 왕당파였던 그의 삼촌의 재산을 물려받을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이때에 그는 도머 경과 러브레이스 경의 가정교사로 있을 때부터 준비했던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정체'를 써서 칼빈주의를 열렬히 옹호했습니다. 사실 그의 신앙적인 방황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쟁과 관련된 몇몇 주제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는 확신을 가지고 이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오웬은 1643년에는 에식스의 포드엄에서 목회에 전념했고, 메리 루크와 결혼해서 11자녀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10명의 자녀는 어려서 죽고, 딸 하나도 성인이 되어 결혼한 후에 곧 폐결핵으로 죽게됩니다. 포드엄은 작고 한적한 마을이었고, 그는 거기에서 청교도 목회자로서 아주 모범적이고 진실한 목회를 하면서, 의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할 정도까지 명성을 얻었습니다.

    첫 의회 연설 이후

    오웬은 1646년4월29일에 장기의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했는데, 그 설교에는 장로교를 탈피해서 회중주의(독립파)로 옮겨가는 성향이 엿보인다. 그 해에 에식스의 코그셸로 이사해서 회중교회를 시작했지만, 회중주의 원리들을 채택한 것이 그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에식에 중요한 상업 도시 였던 코그셸은 포드엄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 곳 사람들은 오웬이 포드엄 교회 사정으로 사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청빙 했고 그 도시의 후원자인 워릭 백작은 이것을 즉시 재가했습니다.​ 오웬이 코그쉘에서 목회를 하자, 회중은 순식간에 2000여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1647년에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에 죽음'을 써서 다시 아르미니우스 주위를 공격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는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1649년에 오웬은 영국국왕찰스1세가 처형된 다음날 의회에서 설교했고,4월29일에 그가 행한 또 다른설교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이 진실해야한다는 취지였는데 이 설교가 의회는 물론이고 청교도혁명을 이끈 올리버크롬웰의 호의를 얻게 해주었습니다. 크롬웰은 오웬을 자신의 전임목사로 삼아서 아일랜드로 데려갔고 스코틀랜드 원정에도 동행하게 하였습니다.1651년에 크롬웰은 오웬을 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의 학장으로 임명했고,1652년 9월에는 옥스퍼드대학교에 부총장으로 임명해서 이 대학교의 개혁을 맡겼습니다.이 대학교의 총장은 크롬웰 자신이었기때문에 부총장직은 이 대학교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자리였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장로파였던 에드워드 레이널즈가 맡고 있었습니다.오웬은 1653년 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다음 편에 오웬의 이후의 생애에 대해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